백수로 사는 것의 장점은 사실 백만개쯤 된다.
밤새 놀아도 다음날 출근의 압박이 없다는 것 외에도, 마음먹기에 따라선
그 누구보다도 풍요롭고 풍부하게 일상을 채워나갈 가능성이 무궁한 삶이다.
그러나 굳이 단점을 꼽는다면
나의 경우에는 말수가 점점 적어지는 것이 걱정이다.
간간히나마 하던 아르바이트마저 모두 그만둔 이후에는 일주일에 2,3일밖에 밖으로 안나가는 일이 허다한데, 식구들도 거의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게 된다.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밥도 해먹고 글을 좀 끄적이다보면 저녁이 되고, 그러다보면 하루 종일 단 열마디의 말을 안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원래 화를 많이 내거나 감정이 격한 성격도 아니고, 갈등상황은 왠만하면 만들지 말자고 생각하는 편이라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거나, 불편한 상황이 있어도, 나에게 해가 되거나 못견딜 정도가 아니면 그냥 참거나 무시하는게 속이 편했는데, 요새 혼자 집에서 생각만 많아지다보니 더더욱 말을 사리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가령 내 앞에서 A가 정치적으로 좀 불편한 농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자.
5년전만 해도 오만가지 예를 들어가며 니가 하고 있는 농담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했을 것 같은데, 요새는..
나: A야
A: 어 왜
나: (아 근데 내가 지금 여기서 A에게 뭐라고 하면 난 또 한시간쯤이나 걸려서 얘를 설득해야할거고, 그렇지만 얘도 저나이나 되서 새로 각성할 가능성도 없을텐데 어차피 한시간쯤 지나서 '에휴 곤두자' 라면서 감정이나 상해 돌아서겠지? 에휴 뭐 어차피 깊이있게 만나는 사람도 아니고, 걍 각자 갈길 가는거지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옹 후우.. ) 음.. 아니야
이런식의 반복이다.
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에휴 뭐 환갑이 다되가는 사람인데 내가 뭘 설득해서 얼마나 바뀌겠어, 걍 들어주는것도 효도려니 해야지.. 결과적으로 잘사는 걸로 나는 내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걸 보여드리면 언젠가는 뭐 인정하실 날이 오겠지.. 지금 논쟁을 한다고 정상적인 토론이 될리도 만무하지뭐..) 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일을 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들어도
"(그래 뭐 일이야 어떻게든 끝나기만 하면 되지, 여기서 왈가왈부해서 내방식대로 일했다가 괜히 책임져야할 일만 많아지고 그냥 분위기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솔루션 한번 날려주면 그걸로 내 존재가치는 충분히 입증되는거니까..뭐 일이 크게 잘못될거같지도 않고 내가 고집부려봤자 여기서 시간만 더 지체될테니까 중요한 일도 아니니 그냥 대충 넘어가지뭐...) 네."
아 물론, 저런 상황에서 마음이 딱히 불편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부글부글 속은 끓는데 말은 못하고 혼자 끙끙대는 타입은 아니고, 할말은 하고, 안할말은 안하는것 뿐인데, 문제는 그 '안할 말' 이 점점 늘어간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더해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다보니 그런 경향이 가속화되어서 최근에는 급기야 '이러다가 언어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진지하게 했을 정도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이 머리에 있는 생각을 조리있게 '말'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방법인데 요새는 그 '조리있게 말로 정리하는' 과정이 점점 퇴화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 사라믈을 만나서 말을 하다보면, 머리->입으로 말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입이 말하고 있는 기분이 자주 들 정도다.
이거야말로 '말하는 과정'에 퇴화가 생겼다는 증거가 아닐까!
결국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에서 혼자있을 때 열심히 말을 해보겠다는 말도 안되는 다짐마저 했다. 성대를 울려서 목소리를 내는 실체있는 '말'을 계속 안하다가는, 언어표현에 심각한 장애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선배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말을 업으로 삼고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혼자서 말을 하는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한다. 커피잔이든, 샤워기든, 마우스든.. 잡고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조리있게 말로 풀어내는 방법을 연습한다는 것이다.
웅얼거리거나 머릿속으로 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나도 이렇게 글만 쓰지말고 그런 훈련법을 도입해야겠다.
"노트북아 오늘은 반년만에 블로그에 글을 썼어. 이제 아무도 오지는 않겠지만, 차근차근 다시 쓰다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보겠지? 물론 이런 생각도 한 열번째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
결국 이게 히키코모리의 초기증세인가 싶기도 하다.
고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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